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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대장암일기

[대장암 일기] 21. 다짐

다짐

 

 오늘도 어김없이 520.

 핸드폰 알람이 적막한 방 안을 가득 메우기 전, 다급히 일어나 알람을 끄고 시간을 확인한다.

 

 후아…’

 

 복직한지 며칠이 지났지만, 1년이 넘도록 잊고 있었던 습관이라 그런지 이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가자 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 무거운 공기들 몇몇이 뒤를 따라온다. 아내가 깨지 않게 슬그머니 방문을 닫고 거실 불을 켰다. 눈이 너무 부신 탓에 한참 동안 고개를 떨구고 바닥을 응시하다 고개를 슬쩍 들어본다. 갈아입을 옷을 옷장에서 꺼내와 거실에 툭 던져놓고, 세면대와 샤워기 물을 동시에 틀어 놓는다. 세면대로 흘러나오는 물에 칫솔을 흔들어 물을 묻힌다. 세면대 수도꼭지의 물을 잠그고 양치를 시작한다. 양치를 하며 샤워를 준비하는 것은, 더구나 이 새벽에, 언제나 긍정적인 감정 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한여름에도 이 새벽의 화장실은 찬기가 가득하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샤워기 물 속으로 몸을 피해본다.

 

 샤워를 마치고 집을 나서기 전 까지 나에게는 보통 5분에서 10분의 시간이 주어진다. 이 시간 동안 내 몸 상태를 잘 체크해야 한다. 자신감과 설레는 감정을 갖고 복직을 했지만, 사실 내 몸은 아직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집을 나서서 회사버스를 타는 데 15. 통근버스를 타고 회사 도착까지 1시간. 3분의 1이 짧아진 내 장이 이 시간을 잘 버텨주기를 바라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출발 전.

가장 긴장되는 순간.

 

어떠한 신호라도 느껴진다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1시간 반 가량 지옥을 경험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내 장의 상태는 아직 내가 가늠할 수 있는 영역에 들어와 있지 않다. 호기롭게 집을 나섰다가도 중간에 멈춰 서서 집으로 다시 돌아갈까 한참을 망설였던 적이 적지 않다. 그리고 괜찮을 거라고 위안하며 통근버스를 탔을 때에는 끔찍한 경험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단순히 급하게 화장실을 가고 싶을 때 느껴지는 고통과는 다르다. 내 대장은 아직 잘려나간 녀석의 역할을 대신 하기에는 철이 덜 들어있는 듯 했다. 수술로 절제 해 버린 S결장은라는 녀석이 대장의 끝까지 여행을 마친 음식물을 모아 변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친구를 잃은 횡행결장이 이 역할을 대신 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친구 생각이 종종 나서 그런 것인지 아직도 변덕이 잦다. 이 곳에서 충분히 변을 모으고 숙성시키지 못하고 직장으로 보내 버리면, 직장은 시도 때도 없이 변의를 뇌에 전달하는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이 본능적 신호를 이성적 신호로 막아서야 한다. 한 시간이 넘도록 식은땀을 흘려가며 이 신호들과 싸우고 있노라면 정신이 아득해 진다. 집이라면 그냥 화장실을 자주 가면 될 문제이겠지만, 통근버스에서는 참을 인을 허벅지에 새겨가며 참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끼이익

 

익숙한 버스의 브레이크 소리가 오랜 여정 끝에 한숨을 토해낸다.

 

드디어 도착했군

 

버스에서 내려 회사 건물로 발걸음을 옮긴다. 참아왔던 것들을 쏟아내기 위해서 화장실로 걸음을 재촉해 본다. 방심하지 마라. 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모든 숙제를 해결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아니 백결 가볍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겠구나.’

 

퇴근 길에도 똑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다만, 더 고통스러운 것은 퇴근시간은 출근시간보다 더 길이 막힌다는 것이다. 1시간 남짓한 출근 시간이지만, 퇴근시간은 1시간 반 정도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쉽지 않은 일들이지만, 이 것들을 견뎌내지 않고서는 정상적으로 생활을 영위해 나갈 방법이 없다. 이 모든 것들은 나에게 주어진 정상생활의 마지막 범주에 들어가는 일들이므로, 어떠한 의미를 부여해서든 이겨내야 한다. 이 것들을 이겨내지 못하면, 주저앉아야 한다.

 

주저 앉아도 좋다고 했다. 그게 내 인생의 실패는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너를 사랑하고, 어떤 모습이든 응원할 거라고 했다.

 

주저 앉으면 안되겠다고 다짐했다. 그게 내 인생의 실패는 아니겠지만, 지금까지 살아 온 내 인생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나도 당신들을 사랑하고, 그 응원에 보답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보답은 내가 최선을 다 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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