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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대장암일기

[대장암 일기] 19. 자유롭게

여행

 

 혼자 무엇인가 할 수 있을까?

 

 잠시 동안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처해 있는 모든 상황으로부터. 집에 혼자 남겨진 남편을 향한 아내의 걱정으로부터. 매일 끼니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염려로부터. 이번엔 또 무얼 해 먹여야 할지 고민하는 나 자신으로부터. 사람들의 위로와 다독임으로부터.

 

 아니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었다.

 

 바깥 음식 조금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아.’

 혼자 돌아다닐 수 있어.’

 더 이상 환자가 아니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야.’

 

 이제 넌 괜찮아.’

 

 집에 홀로 남아 하루에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말한다. 스스로에게 오기를 부려 한 끼를 굶어 보기도 하고 스스로 자극적인 음식을 만들어 먹어본다. 운동을 걸러보고,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지내본다.

 

 누구는 가끔 이렇게 하잖아?’

 

 그러나 조금씩 내 목을 조여오는 불안감은 떨쳐낼 방도가 없다.

 

 이런 건 건강한 사람들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야.’

 

 여보, 나 혼자 여행 좀 다녀와도 될까?”

 그럼. 당연하지. 좋은 생각이야. 복직도 얼마 안 남았으니, 얼른 다녀와야겠네?”

 

 아내는 적극적으로 나의 여행을 지원해 주었다. 아내가 ?’ 라고 먼저 물었다면, 나는 또 내 상황을 환자라는 핑계를 대어가며 변명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아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막상 떠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매일같이 스스로를 옥죄는 나 자신을 답답해 하면서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도, 나는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그렇게 아침 일찍 전주행 KTX에 몸을 실었다. 1시간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내려가는 내내 설렘으로 가득 찬 나를 발견했다.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여행자로서의 설렘이 아니라, 나를 내 스스로 가둬두었던 그곳으로부터의 해방.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이 사람들과 섞여서, 아무렇지도 않은 수 많은 존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평범한 그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전주역에 도착해서 돌아다니는 일정에 나는 사실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나의 목표는 오롯이 혼자가 되어보는 것이었다. 전주역에서 버스를 타고 한옥마을로 이동했다. 택시를 타는 것은 빠른 길이겠지만, 재미있는 길은 아닐 것이다. 버스를 타는 것이 더 많은 사람들과 마주할 수 있고, 더 많은 풍경과 마주할 수 있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말투. 그들의 태도. 언젠가부터 나는 이 모든 것들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한옥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부터 소풍을 나온 어린 학생들. 전동성당의 역사나 분위기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친구와 계단 몇 개를 한번에 뛸 수 있는지 실랑이를 벌이는 아이들. 아침 일찍부터 전동성당의 전경 사진을 찍으러 왔다가 어린 학생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눈살을 찌푸리는 중년의 사진가들. 친구와 한복을 빌려 입고 거리를 그득그득 웃음소리고 채워나가는 여학생들. 7,80년대 검은 교복을 입고 여기저기서 셀카를 찍으며 함박웃음을 짓는 중년의 부부들. 이들이 활보하는 거리 뒤의 풍경이 되어버린 장기판을 벌이는 어르신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걸어 다니는 비둘기들. 따사로운 햇살 아래 그 모든 것들에는 생기가 돌고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1시간 남짓이면 모두 볼 수 있는 전주 한옥마을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걸을 때 마다 보이는 그들의 웃음과 행복은 서로 다르지만 또 같은 것들이었다. 이전엔 알지 못했던 그 따뜻함.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기울자 마을은 금새 주황 빛으로 물들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다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길거리는 떠나는 손님들을 뒤로하고 장사를 정리하는 상가의 아쉬움으로 가득 찼다. 길거리를 더 돌아다녀도 곧 떠나야 하는 사람들의 아쉬움과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내려는 이들의 분주함이 거리를 차갑게 식혀가고 있었다. 나도 곧 숙소를 찾아 그들처럼 거리에서 사라졌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나는 낯선 공간에 혼자 누워있었다. 전혀 익숙하지 않은 이 곳에서의 잠자리가 그 어느 때 보다 편하다.

 

 나는 이제 자유로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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