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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대장암일기

[대장암 일기] 17. 방심

방심

 

 여보세요.”

 

 아내의 핸드폰이 울리고 조심스럽게 아내가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감사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몇 마디 나누더니 내 안부를 전화기 너머로 전한다. 내 상태를 알고 걱정하고 있는 그 누군가 일 것이다. 나를 걱정하는 마음보다 남편을 간병하는 아내를 걱정하는 그 누구. 아내는 연신 만 반복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말을 전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기 시작한다.

 

 무슨 일인데 그래?”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아내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분, 오라버니가 췌장암 말기였대. 그런데 치료를 다 거부하고 산으로 들어갔대. 원래는 시한부로 5개월 선고 받았는데, 지금은 5년이 넘게 살아계신대.”

 

 암 판정을 받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버리셨단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민간요법이라고 부르는, 요즘 사람들이 자연치유라고 부르는 치료법을 선택한 사람이다. 현재 한국 췌장암 환우 협회 회장직을 맡고 계시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이 환우 협회는 모임을 갖는단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내가 혹은 나의 아내가 그 모임에 한번 가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휴우……”

 

 마음이 상당히 불편했다. 길고 긴 항암 치료도 드디어 끝이 났다. 이제 암이라는 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생각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마음을 먹은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누군가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이런 제안을 해 온 것이다.

 

 마음에 좀 걸리면 자기는 가지 마. 나 혼자 가서 듣고 와도 될 것 같아.”

 “……”

 

 나는 결정을 미뤘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나는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다 나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죽음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지켜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의 이야기는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궁지에 빠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나는 이제 암 환자가 아니잖아.

 

 며칠이 지나고 모임 날짜가 일주일 뒤로 다가왔다. 아직도 나는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내 혼자 그런 자리에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아픈 사람은 아니지만, 딱히 그 날 다른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내 없이 혼자 집에 있는 것도 마음이 편한 일은 아니었다. 두세 시간 정도의 강의라면 콧바람도 쐴 겸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강의를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드라이브를 다녀오는 것이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강의 당일. 유난히도 추웠던 그 날. 말기 암에서 생존하신 분의 강의란 것이 대략 건강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 마음 가짐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 일 것이라는 막연한 그림을 그리고 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다. 하지만 강의실의 공기는 내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강의에 참석한 사람 대부분은 췌장암 환우와 그 가족들이었다. - 췌장암은 병기에 관계없이 선고 자체만으로도 생존율이 매우 낮은 암으로 알려져 있다. - 더구나 이런 먼 곳까지 발걸음을 할 정도로 그들은 그들의 한숨 속에 절박함을 가득 싣고 왔다. ‘죽음과 대면한 사람들의 공기란 것은 이루 말하기 힘든 그 어떤 것이었다. 아픈 아내를 2년 넘게 간병하고 있는 남편. 지난 주에 암 선고를 받고 치료를 포기한 환자와 그 가족들. 2주 전에 암 선고를 받은 어머니와 간병을 해야 하는 그 아들. 이들이 채우는 공기는 내가 감당하기 힘든 그 무엇이었다. 강의가 시작되자, 강연자는 이런 공기부터 걷어내기 시작했다. 그에게 이런 공기는 처음 느끼는 공기가 아닐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무겁지 않게. 같은 자리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병기와 상태를 묻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냥 그들의 상태를 묻는 것 같았지만, 그 속에는 다른 사람들도 당신과 같은 상태 혹은 더 힘든 상태에 있다는 것을 공유시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그 후, 2시간 정도 예상했던 강의는 10시간 가까이 진행이 되었다. 그 아픈 환자들이. 10시간이 넘도록 같은 자리에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고작 대장암 2. 고작 항암치료 6회만 완료한 나도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강의가 끝나기 전에 먼저 자리를 뜬 사람은 없었다. 이런 환우와 환우 가족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한 환기가 되었다.

 

 당신은 수술한 부위가 정확히 어딘지 알아?”

 지금 하는 치료가 어떤 치료인지 정확하게 알아?”

 당신 몸이 지금 왜 그런지 알아?”

 통증이 왜 오는지 알아?”

 

 난 이 질문에 속 시원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의사가 설명해준 대로 외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주입하고 있었다.

 

 의사선생님이 알아서 잘 해 주셨겠지.’

 

 내가 이 병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암이 왜 생기는지. 어떻게 전이가 되는지. 치료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내 몸에서 절제된 그 부분이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부작용들이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앞으로 내 몸 상태는 어떻게 바뀌어 갈 것인지. 아무것도 알고 있는 것은 없었다.

 

 지 몸이 아픈데, 왜 아픈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이게 얼마나 무책임한 건지 알아?”

 나는 나에게 무책임했다. 아프기 전에도 그랬고. 아프고 나서도 변하지 않았다.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끝내고, 항암치료를 마치는 지금까지 내가 했던 것이라고는 그저 힘들어 하는 것뿐이었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며 우울증에 빠져 사는 것. 가족들에게 미안해 하며 눈물 짓는 것. 아무런 근거도 없는 정보에 기대어 내 건강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 나는 결국 아직도 내 건강, 내 몸 상태에 대해서 방심하고 있었다.

 

 아프기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