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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대장암일기

[대장암 일기] 18. 봄

다시 봄

 

 날씨도 좋은데, 어디 나갈까?”

 

 아내가 묻는다.

 

 글쎄……어디 가지?”

 일산도 좋고, 날씨가 좋으니깐.”

 

 작년 봄, 성치 않았던 몸을 이끌고 아내와 가끔 일산에 가곤 했다. 수술 후 한 달이 지나고 화장실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서 매일 집에만 있기 답답해 하던 아내와 나를 위한 외출이었다. 물론 도시락 지참. 힘들게 자동차를 달려 도착한 일산에서 고작 하는 일이라고는 근처를 배회하는 것과 30분 남짓 오락실에서 노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외출도 4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많은 것이 불편했을 외출이었지만, 집에만 있던 아내와 나에게 당시에 이보다 더 기분 좋은 외출은 없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다시 일산에 갈 생각을 하니 새삼 다시 봄이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나에게 다시 봄이 왔다. 쏟아져 내릴 것 같던 배 속의 장기를 죽을 힘을 다해 부여잡으며, 걸음마를 다시 때던 작년 이맘때. 병동에서 힘든 걸음을 옮기며 매일같이 바라보던 황사 가득한 하늘위로 우뚝 솟은 남산타워. 내 병이 나으면 반드시 가리라 마음먹었던 그 남산타워를 뒤로하고 병원을 나와 집으로 향하던 그 걱정 가득했던 차 안. 그리고 그 걱정보다 더 잔인했던 퇴원 후의 생활들. 그 모든 것들이 봄의 기운을 받아 겨우내 추위를 견디고 어렵게 피워 낸 꽃 봉우리처럼 다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듯 하다.

 

 아파트 단지 내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수도 없이 멈춰 서야만 했던 그 짧지만 길었던 운동. 식사 중에도 가리지 않고 드나들었던, 잠들었다가도 수 없이 드나들었던 화장실.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나에게 고정되어 있던 어머니와 아내의 눈동자. 그 안쓰러움. 걱정들. 지난 봄에 피어났던 꽃들은 이제 모두 지고 없다.

 

 어머니를 고향으로 내려 보내고 아내를 복직시키면서 시작된 내 외로움과의 싸움. 1년간 잘 회복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나태해져 가는 내 의지와의 싸움. 갑자기 나타나 내 발목을 잡고 저 밑바닥을 향해 나를 끌어 당기는 또 다른 나와의 싸움. 올해 핀 꽃들은 지난 봄의 그것들과는 다르다.

 

 나의 기억은 이따금씩 작년 그 때로 돌아간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곳에 제멋대로 머물러버린다. 나는 아직도 운동을 위해 산책을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화장실에 가는 것이 몹시도 두렵다. 나는 아직도 미안하다. 그리고 또 미안하다. 올해 핀 꽃들은 지난 봄의 그것들과 같다.

 

나에게 봄과 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그 이상이다. 갑자기 어느 가지 하나에 생겨난 꽃 봉우리는 그 가지, 그 나무의 생명이 다 할 때까지 매 봄마다 꽃을 피울 것이다. 그리고 그 꽃은 다음 봄을 위하여 반드시 질 것이다. 꽃은 잠시 피었다가 지겠지만, 꽃은 곧 그 나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봄을 기다릴 것이다.

 

 어느 날 찾아온 암이라는 큰 병은 내 인생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나에게 남아있는 두려움, 죄책감 우울증은 아마 매번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나를 괴롭힐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매번 이것들을 이겨낼 것이다. 이 아픔들은 잠시 나를 괴롭히는 것들이겠지만, 이 아픔들은 곧 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