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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대장암일기

[대장암 일기] 16. 어리광

마지막 항암

 

 항암 주사를 처음 맞고 어쩔 줄 몰라 하던 기억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는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 냄새. 그 느낌. 그 공기. 모든 것이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은 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벌써 7개월이나 지났다. 6차 항암 계획의 마지막인 여섯 번째 항암이지만, 적응 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마지막 주사만 맞으면 모든 것이 끝이 나건만, 그 주사를 맞으러 가는 길은 처음 주사실로 올라가던 발걸음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휴우……!”

 

 마음을 다잡는다고 크게 한숨을 쉰다는 게 그만 주사실의 냄새를 한번에 모두 들이키고 말았다. 주사를 맞으면 맞을수록 작은 냄새에도 민감해 진다. 더구나 가장 맞기 힘든 일주일의 마지막 항암주사. 그리고 이번엔 아내가 아닌 부모님과 함께 치료를 받으러 왔다. 징징댈 사람이 곁에 없으니 더 힘든 것 같다.

 

 아내는 내 마지막 항암 치료를 앞두고 복직을 했다. 항암치료가 끝나갈 무렵, 아내는 나의 의사를 존중하겠다며 복직에 대한 결정을 나에게 미뤄왔다.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내가 복직을 미루고 조금 더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컸다. 사실, 내가 아프고 나서 아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해 졌다. 아내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그 동안 하지 못했던 서로의 말들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평소의 생활대로라면 서로 일에 치여서 저녁 늦게 한두 시간 동안 직장에서의 불만만 이야기 하다가 하루를 마무리 했을 것이다. 이런 생활에서는 서로를 알아가는 데에 아마도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아프긴 하지만, 아내와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 점점 아내와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행복하게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서 아내의 복직은 나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미루면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내와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본 것이 하나 더 있다면 바로 아내의 답답함이었다. 아픈 남편을 위해서 갑자기 올라오신 시어머니. 그 생활도 쉽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남편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 또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에 의해 통제 받고 있었다. 친구들도 만나고 싶고, 친정식구들도 보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아내의 이 모든 자유는 사라져 버렸다. 아내는 괜찮다고 했지만, 내 눈에 보이는 아내는 무척 답답해 하고 있었다. 내 항암치료도 이제 거의 끝나가는 상황에서 내 입장만 고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복직을 권했다. 이게 내가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잠시 동안이라도 집안 일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다. 잠시 동안이라도 로 인한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하고 싶었다.

 

 어쨌든 그렇게 아내는 출근을 했고, 나는 부모님과 함께 마지막 항암치료를 받으러 왔다. 부모님이라서 어리광을 더 피워도 될 것 같지만, 지금 나에게 부모님은 사실 마구 어리광을 피워도 될 만큼 편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주말에는 집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주었지만, 어머니는 주말이라고 공부하지 않는 아들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더구나 아버지는 공장 교대근무시간에 맞지 않으면 거의 얼굴을 뵙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에는 다시 학교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와서 부모님과의 왕래는 더 뜸해질 수 밖에 없었다. 회사 입사 후에는 명절 이외에 거의 부모님을 뵈러 내려간 적이 없다. 15. 이 긴 시간 동안 부모님과 나는 가끔씩 안부를 묻는 사이로 남아버렸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어리광은 참으로 염치없는 짓이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라는 존재는 부모님의 말을 참 잘 듣는 아이였다. 한 번도 부모님을 실망시킨 적이 없는 아이.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서 부모님을 걱정시켜드린 것 외에, 부모님의 기대에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아들. 이런 아들이 지금 인생에서 가장 나쁜 성적표를 들고 당신들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어리광.

 

 이것은 내게 너무나 염치 없는 일이다.

 

 괜찮니?”

 어디 좀 앉아 있다가 갈까?”

 

 내가 항암 주사를 맞고 나면 극도로 예민해 져 있다는 것을 부모님도 알고 계신다. 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인다. 병원 바깥으로 잠시 나가서 바람을 좀 쐬고 햇빛을 좀 맞아본다. 코와 폐 속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항암제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모두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심호흡을 몇 번 한다.

 

 이제, 집으로 가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부모님께 말씀 드리고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이제 다 끝났다. 이제 끝이야. 수고했다.”

 

 조용한 차 안에서 어머니가 힘들게 입을 떼셨다. 아버지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신다.

 

 정말 다 끝난 것일까.